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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생기념병원 (BONGSENG MEMORIAL HOSPITAL est. 1949) 전문센터/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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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이식센터

신장이식수기

봉생기념병원 신장이식 수술 1000례 기념 ‘희망+나눔 이야기 수기공모전’ 수상작을 소개합니다.

[참가상] 새로운 행복을 찾은 우리 - 오관식 님

2019.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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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한민국 해군의 최정예 잠수함 승조원(Submariner)이었습니다.

 

힘든 생활 속에서도 아무나 갈 수 없는 어둡고 거친 바닷속을 누비고 다닌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물론 바쁜 일정으로 가족들과 함께인 시간은 줄었지만, 그 생활이 정년이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어느 순간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몸이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지고, 피곤함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급기야는 잠들기 전 구토증세가 있을 정도로 상태가 점점 나빠졌습니다. 그동안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신장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던 참이었지만 계속 나빠지는 상태에서 잠수함 근무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함정근무가 부적격하다고 판정되어 사무실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늘어갔습니다. 저에게는 계속 나빠지는 몸을 개선하기 위한 절실한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대학병원에서 봉생병원으로 병원을 옮기면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다시 잠수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과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힘겹게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4년 1월 Cr 수치가 위험 범위를 넘어서자 입원을 해야 했고 급하게 목과 가슴에 차가운 의료 기구가 삽입되자 그나마 남아있던 자그마한 기력마저 소진되어 버렸습니다. 단지 무기력하게 침대에 몸을 눕히고 있는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족들과 동료들의 걱정 속에 병원 침대에 누워 치료를 받았지만 지내왔던 내 인생이 너무 후회되고 또한 원망스러웠습니다. 앞날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금의 상태에 절망해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함부로 표현할 수는 없었습니다. 곁에서 저를 보고 있는 그분들에게 더 이상의 걱정을 함께 하자고 할 수 없었습니다. 오기로 더 괜찮은 척,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위중한 상황에서 목을 통한 투석이 시작되고 2~3일에 한 번씩 3~4시간을 그렇게 누워있었습니다. 주변에는 저와 비슷한 환자들이 같은 표정으로 누워있었습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더 이상의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한 삶의 몸부림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걱정하는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한 명의 환자가 되어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가족들은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 항상 미소를 보였습니다. 큰 짐이 된 듯한 죄책감이 저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가족들은 용서하고 응원했습니다. 그것이 힘든 삶을 유지하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동료들도 그들만의 힘든 상황에서 따뜻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곤 했습니다. 그제야 제 곁에 있었던 분들이 저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커다란 보물이었는지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있어 앞으로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힘을 내야만 했습니다.

 

이식을 받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이 서로 증여자가 되기 위해서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증여자로 결정되었습니다. 검사를 위해 병원에 오시는 어머님에게 “죄송합니다.”라는 말씀 외에는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오히려 “미안하구나, 아들.”이라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참을 수 없이 슬프고 죄송스러웠습니다.

이식하는 당일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어머니에게 “어머니, 사랑하고 죄송해요.”라고 말씀을 드렸고, 그리고 각자 차가운 침대에 누웠습니다. 긴장으로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습니다. 보이는 것은 초록색의 수술 관계자분들과 하얀색 천장. 마음을 강하게 먹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깨어났을 때 이미 저의 삶은 새롭게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몸은 아직 무겁지만 제 안에는 가족의 사랑이 넘쳤고 머릿속엔 희망이 가득 찼습니다. 회복하는 동안 밤새 간호를 해주던 아버지는 (여전히 무뚝뚝하지만) “고생했다. 이제 잘 살아야지.”하며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다행히 수술 경과도 좋았고 건강하게 회복했습니다.

 

입원 후 약 2개월간, 병원에서 퇴원하기 전까지 제 삶의 태도는 크게 변했습니다. 완벽하게 다시 태어난 듯했습니다. 병실에서는 계속 몸을 움직이고 또 움직였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다시 건강한 모습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복귀하겠다는 작은 희망으로 군으로 돌아와도 제가 있을 곳은 없었습니다. 퇴원하고 2개월 후 해군본부 심사에서 전역 통지를 받았고 집으로 내려오는 차 안에서 아내는 저 대신 매우 슬퍼했습니다. 차마 저는 슬퍼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새 삶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할 때였습니다. 약해질 수 없었다고 다짐했습니다.

 

아내는 가족을 위해 저 대신 일을 시작했고 저는 오롯이 집에서 회복하며 살림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큰딸과 유치원에 다니는 작은딸을 위한 시간을 오랜만에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전화위복’이라고 하듯이 악몽 같았던 일로 인해 가족들과의 관계는 전보다 진해지고 집은 더욱 사랑이 넘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매우 절실하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또한, 건강한 신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관리했습니다.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전역 1년 뒤, 드디어 현역 군인이 아닌 군무원 신분으로 다시 해군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족들의 헌신과 사랑으로 저는 새 생명과 새 직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식 수술 이후 4년, 마흔이 된 지금의 삶은 여전히 만족스럽습니다. 작년에는 결혼 10주년을 기념하여 가족들과 괌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아마도 이전의 생활에서는 꿈꾸지 못했을 그런 행복감을 지금에서는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진급도 했고 둘째 딸이 초등학생이 되는 참 행복한 시기입니다. 더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건강도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좋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을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지금의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을 정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신 김중경 원장님과 이식 수술을 집도해주신 의사 선생님들, 그리고 모든 봉생병원 식구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해당 글은 오관식 님께 원고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